멀리 전라도로 아들과 함께 좀 피곤하여 여행사로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까 하여 당일로 다녀와보았다. 날씨가 더웠다. 한 대의 버스에 빽빽하게 들어찬 덕분에 좀 갑갑하였지만, 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웠다. 양림 역사 문화마을은 100여 년 전 광주 최초로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통로이자 희생과 나눔의 공동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광주역사의 시작점이며, 문화자원 중심지가 조성되어 있다. 양림동에서는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할 수 있다. 양림역사문화마을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과 한옥이 어우러진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다. 광주의 의료와 교육을 발전시킨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, 조선 상류층 가옥의 풍채가 전 해지는 이장우 가옥, 민주화의 어머니이자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신 조아라 여사를 기리는 조 아라기념관, 농촌을 살리기 위해 애쓴 농촌지도자 어비슨의 기념관,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 교한 오웬을 기리는 오웬기념각, 정율성 업적과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정율성 거리, 주민들과 예술 가들이 폐품을 모아 예술작품으로 꾸며낸 펭귄마을 등 근대와 현대의 다양한 매력이 공존한다. 다음으로는 포충사를 갔다. 포충사에서의 우리 나라 역사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고, 지금의 우리가 우리 나라의 역사 속의 조상들의 노력에 비해 좀 모자란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. 고경명은 1592년(선조 25)에 예조판서(禮曹判書)로 추증되었으며 1771년(영조 47)에 부조지전(不?之典)[사당에 신주를 영구히 모시게 하는 특전]을 명받았다.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포충사(褒忠祠)는 1601년(선조 34) 고경명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, 1603년(선조 36)에 ‘포충(褒忠)’이라는 사액을 받았다. 광주는 역시 대구보다는 나라에서 투자를 덜 하는 곳이었다. 도로의 간판들도 대구의 80년대를 보는 듯 했다.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. 전라도에도 투자를 좀 많이 해 주세요.^^ 전국이 골고루, 농촌과 어촌, 산촌에도 골고루 도시와 투자하여 도시에만 집중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여건이 되지 않도록 그 넓은 농어산촌에 좀 많이 투자해주었으면 좋겠다. 도서관, 영화관, 여러 가지 문화 시설, 학교 등 말이다. 우리 나라 좋은 대학들이 시골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. 함양 나비 축제에 갔다. 나비 축제인 만큼 너무 예쁘게 꾸며 놓아서 깜짝 놀랬다.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? 그래서 사람들도 참 많았다. 그런데 그늘은 없었다. 쉴 곳도 없었다. 돈을 내지 않으면....^^;;;나는 아직까지도 나비나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하는 건 여전히 동물 학대라는 생각이 드는데, 전문가들은 또 무슨 얘길 할런지 모르겠다. 그래서 박제한 전시회는 보지 않았다. 사람들이 많아 자세히 구경할 수는 없었고, 가이드님께서 시간 약속을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거기에 신경이 쓰여서 뭘 맘 놓고 구경을 하지도 못하게 되었다. 그래도 아들과 여기 저기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거 하나로 만족하고 싶다. 우리 아들은 즐거웠나? 좀 힘들었을 것 같다. 사람들이 많아서 아들과 오붓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, 사람에 치여서 그냥 이리 저리 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. 하지만 나비라는 말만큼이나 축제장이 참 예뻤다. 우리 나라 사람 참 똑똑하구나...그 생각을 했다.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꾸밀 수가 있지? 똑똑한 머리에 가슴도 좀 같이 따뜻하면 우리 나라 정말 최강이 될 텐데...아쉽다..ㅋㅋㅋ 대구 안에서 축제를 한다고 대구 들어와서 버스가 시내를 얼마나 우회하는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내려달라고 해서, 한참을 걸어서 집에 왔다. 마지막이 좀 아쉬운 여행이었다..ㅠㅠ